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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동과 시인 이육사





                             

                     종암동과 시인 이육사


한 사람의 문학가나 예술가 때문에 한 마을 또는 작은 도시가 유명해지고

심지어 도시 전체가 그 유명세 때문에 먹고사는 경우는 도처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한국의 경우 산골 작은 마을 강원도 봉평이 그 좋은 사례라 할수 있다,

이효석 이라는 걸출한 문학가가 쓴 한편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무렵" 은 봉평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고 봉평을 먹여 살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어디 그 뿐 이던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때문에 유명해진 양평군 서종면의

소나기 마을, 그리고 "동백꽃", "봄 봄" 을 쓴 김유정의 김유정역이 있는 춘천시 신동면,,

김영랑 문학관이 있는 전라남도 강진,,  또,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된 평사리..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악양들판..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줄기를 보듬고

넉넉하게 자리잡은 평사리. 이곳또한 빼놓을수 없는 한국최고의 관광지가 아니던가,,

                         


                                      


외국의 사례는 헤아릴수없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섹스피어가 "햄릿" 을 구상 했다는 덴마크의 크론버그성은 일년에 수백만명이

이곳을 찾아오며, 안델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동기를 얻어 1913년

에드바르드 에릭센(Edvard Eriksen)에 의해 만들어진 키 약 80cm의 작은 동상

<인어공주>상을 보려  한해 약 150만명이 코펜하겐을 찾아온다,

                                                 

이제 서울 한강 에서도 코펜하겐의 인어상과 거의 똑같은 인어상을 볼수있다,

코펜하겐시와 서울시가 2014년 맺은 우호도시 협약으로 코펜하겐 시로부터

인어상 모조품을 기증받아 한강변 여의도 물빛광장에 설치 하였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 를 집필한곳은 쿠바의 아바나

외곽 항구로 도심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인구라야 고작 10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인데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1939~1960까지 거주하며 "노인과 바다" 를

집필한것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세계도처에서 수많은 문학도와

관광객이 이 먼 외딴곳을 찾아오고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에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 기념비가 있는 분수광장이 있다,             

이곳은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에스파냐 광장으로 마드리드 최고의 번화가인 그란 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30년〈돈키호테〉로 잘 알려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인데 기념비 중앙에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산초 판사의

청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또한 돈키호테를 쓴 작가의 기념비를 보려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매년 이곳으로 몰려든다,


미국의 뉴올리언즈는 재즈의 발상지로도 유명 하지만 <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작품

무대로도 너무나 유명한 도시이다, "테네시 윌리엄즈" 는 미국 미시시피주 콜롬부스에서

태어 났지만 뉴올리언즈를 무대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집필해 뉴올리언즈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넘처나는 유명한 문학의도시가 되었다,  "욕망".. "DESIRE", 실제 이곳엔 전차도

전시되어 있다. 시가지 한쪽끝 옥외 전시관에 곤충의 빈껍질같은 움직이지않는 전차는 453이란

차 번호와 함께 정면 이마에는 "DESIRE".. "욕망"이란 이름표를 달고있다, 테네시윌리엄즈의

문학을 사랑하는 수많은 세계인들이 이 낡아빠진 전차를 보러 이곳으로 몰려드는것이다,


전차하면 나는 돈암동의 전차를 잊을수 없다, 1967년 10월 학생 신분으로 서울시 공무원

공채에 합격하여 서울시청 인사과 보임2계에서 임용장을 받고 첫 근무지인 성북구청을

난생처음 찾아가는데 돈암동 태극당 빵집앞에 서있는 전차를 본것이다, 당시 그곳이

돈암동 전차종점 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촌뜨기의 눈에는 더없이 도시적인 낮선 풍경 이었고

신비스러운 교통수단 이었다, 그날의 감동이 훗날 사진작가가 된후 음악가 드보르작이

기차를 좋아했던것 처럼 기차사진을 즐겨 촬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 한국에서는 <이육사>라는 민족저항시인이 한때 거주하면서 주옥같은 시를 쓴

서울 동북부 성북구 "종암동" 이 때늦은 만시지탄은 있지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육사 그는 과연 어떤 시인이었나?  이육사라는 필명은 감방의 죄수번호 264 였다,


님은 무려 17번이나 감옥을 제집 처럼 드나들었다, 님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나

애국시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생 하시다가  40세에 북경 감옥에서 옥사 했다,


"내가 죽어도 울지마라, 조국이 해방된 후에 울어라"

모친은 6명의 자식에게 그런 유언을 남겼다, 그 어미에 그 자식이 있었다,


민족저항시인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43년 4월에 북경으로

가서 국내무기 밀반입 계획을 세웠지만 체포되어 북경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후

1944년 1월 16일 의롭게 순국하셧다,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되었다가 광복후 1960년 그가 출생한 안동으로 이장 되었다,

참고로 "오감도" 와 "권태" 를 쓴 천재시인 "이상" 은 1937년 4월 17일 도오꾜 제국대학교

부속병원에서 향년 28세 폐병으로 사망후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저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 되었고 

열사 유관순도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행방을 알수 없는 상태이다,


이육사의 정신세계를 만들어낸 뿌리를 손꼽으라 한다면 퇴계 이황, 농암 이현보, 월천 조목 등을

들수 있으며, 이육사에게 빛이된 독립운동가 라면 석주 이상룡, 향산 이만도, 봉경 이원영 등을

들수 있다 생각한다,



                                               



시인 이육사는1939년부터 1941년 까지 현재는 빌라촌이 되어버린 성북구 종암동 62번지에서

거주 하시면서 가장많은 작품을 발표 하셨는데 이때 <청포도>와 <절정>등을 성북동에 거주한

상허 이태준(수연산방 주인) 선생이 주도한 "문장" 지에 발표 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성북구와 종암동 주민자치회 에서는 서울시로 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종암동에

<이육사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건축부지를 확보하고 기념관 설계를 마친 상태이다,

종암동에 <이육사기념관>이 건립되면 이육사 시인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흔쾌히 기증해

주기로 이육사 시인의 친따님 이옥비 여사가 약속한바 있다,

이에 수반하여 종암동주민자치회 에서는기념관 주변골목을 이육사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기로

결정한바 있고 골목 입구에 알림 조형물 아치 설치를 위한 예산을 서울시에 요구해놓은 상태이다,


이제 머지않아 종암동은 이육사를 상징하는 문화마을로 각광 받으며 서울의 새로운 문화 명소가

되어 많은 문학인들과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오는 이육사 문학의 산실로 거듭날것이다,


또한 종암동주민자치회 에서는 새롭게 건설될 동북선 경전철역 종암동 구간역중 한곳을 이육사역 이란

이름의 역으로 명칭을 정하기로 결의 추진하고 있다, 종암동 주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이에 거는 기대가 매우크며 종암동 주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이 요구되고 있다,


참고로 이육사 문학관은 그의 고향인 안동에 있다, 문학관 앞에는 높은 축대에다 육사의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六友堂)이 말끔한 기와집으로 지어여 있다, 생가는 원래 원천리에 있던것을

안동댐 조성으로 수몰을 피하기 위해 태화동으로 이전 했다가 이곳 문학관 앞으로 이전 복원 했으며

이육사는 생가에서 16살까지 살았다 한다,



                    

           이육사의 생애 연보


본명 /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_), 호 육사(陸史)

1904년 4월 4일 / 경북 안동 원천리 에서 출생


1904년 0세 /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년도별 상세 연보


1909년 7세 /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  12세 /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1919년 15세 /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 16세 /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 17세 /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 19세 /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 20세  /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 21세 /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 22세 /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 23세 /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 25세 /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 26세 /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 27세 /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 28세 / 베이징, 텐진에 머뭄.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 29세 /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에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 30세 /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 31세 / 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 32세 /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 33세 /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 34세 /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 35세 / 성북구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 36세 /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 37세 /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 38세 /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 39세 /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 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 40세 /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6년 / 1월 16일 인천 송현동(松峴洞) 동생 원창의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집안이

            모인 자리에서 원창의 셋째아들 동박(東博)을 후사(後嗣)로 결정하다.
            동년 10월 20일, 여러 지면에 흩어진 시고(詩稿)와 유고 등 20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다.

 

1956년 / 4월 10일 서울 범조사에서 미발표 유고로 발표된 「편복」과

            수필 「산사기(山寺記)」를 추가한『육사시집』을 다시 간행하다.

 

1957년 / 가을, 대구 한양 다실에서 <육사 추도의 밤>을 가지다. 이 때의 행사로는

            조지훈의「육사의 민족 운동」, 김종길의 「육사의 시」등의 강연과

            박양균의 추도시「초인(超人)에의 노래」낭독 등이 있었다.

 

1960년 / 봄에 유해를 고향 원촌으로 이장하다.

 

1964년 / 음력 4월 초4일 환갑을 맞아 장조카 동영(東英)이 시비 건립 운동을 펴서 
             신석초(申石艸)·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하다.
             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를 가지다. 이 해 가을에 딸 옥비(沃非)가
             경산 사람 양진호(梁振鎬)에게 출가하다.

 

1968년 /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가 제막되다.
            그 전날 <추모의 밤>이 경안 극장에서 열리고, 또 추모 강연회(연사 : 노산 이은상)가
            안동예식장에서 각각 성황을 이루다. 시비 전면에는 유시 「광야」를 새기고

            비문을 조지훈(趙芝熏)이 짓다.
            그리고 전면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뒷면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쓰다.

 

1974년 /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이 새로이 발굴되다.
            이것은 육사가 직접 신석초(申石艸)에게 준 것으로서, 그동안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라사랑> 16집 특집을 계기로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몇편의 한시(漢詩)도 석초가

            등초해 두었던 것이다. 작품의 연대는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同人) 때로 추정된다.

 

1945년 /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曠野]이 소개됨
1946년 / 원조에 의해 {육사시집(陸史詩集)} 출판됨


                                      2018, 8, 20, 상록수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가 된 봉평 메밀밭


                                                   평창군 봉평의 메밀밭,


                                 가산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필무렵>은  봉평장에서 별 재미를 못 본  허생원 조선달 등

                                 장꾼들이 이튼날 열리는 대화장을 기대하며 달빛아래 밤길을 걸어가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그린내용 ,

                                 소설 본문 중에서 한소절소개하면 ..... 


                                 -- 이지러 지기는 했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믓히 흘리고 있다.

                                 대화 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엇다. 

                                 산 허리는 온통 에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하생략 -  


                                 이효석은 1907 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에서 유진오와 함께

                                 천재로 통했고 34 세때 아내가 세상을뜨자 실의에 잠겨 만주를 여행하고 36 세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소설가......


                                                                      2010. 08. 19, 촬영,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들녁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된 평사리..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악양들판.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줄기를 보듬고 넉넉하게 자리잡은 평사리.

                                    고소산성 오르막에 평사리 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최참판댁>과 박경리 <토지문학관>이 있다.

 

                                    부부송 두 그루는 언제나 다정하게 넓은 악양들을 지키고 있고 이 부부송은 동정호 정자에서보면

                                    한그루로 보여 이색적이다. 내가 평사리에 도착 했을때 하늘은 잿빛으로 흐렸으나 섬진강 바람은

                                    시원했고 평사리 악양들판의 오월은 보리가 누렇게익고 논에는 모내기 준비를 위한 논갈이가

                                    한창 이었다. 문득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안부가 궁금했으나 뵙지는 못했다,

 

                                                                             2012, 5, 19. 촬영,





                                                                                           김유정의 고향 춘천시 신동면의 김유정역



                                           김유정 역은 사진에서 보는 구역사와 최근 새로지은 신역사가 있다,

                                           신 역사는 구역사에서 조금떨어진 위치에 한옥으로 건축하였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국내는 정미 7조약에 의한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맞서 의병 부대가

                                           저항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김유정이 살던 실레 마을도 국적 토벌(國賊討伐) ·

                                           국모 보수(國母報讐) · 배양 척외(排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 기지가 있던 곳이다.

 

                                           어릴 적에 본 의병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작농 · 유랑민 ·

                                           노동자 · 실업자 · 거지에 이르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은 29살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 ·

                                           일기 6편, 번역 소설 2편을 남겼으며 대표적인 그의 작품으로 신춘 문예 공모 당선작인

                                         「소낙비」와 「노다지」가 있고 등단후 작품으로「금 따는 콩밭」,「떡」,「만무방」,

                                         「봄봄」 같은 걸작 단편들이 있다,

 

                                                                                       2017, 9, 12, 촬영,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상과 흡사한 한강변에 설치한 안델센의 인어상 모조품



                                                     덴마크를 여행하는 관광객은 코펜하겐의 상징인

                                                     작은 인어상을 꼭 보고 싶어한다,

                                                     인어상은 안델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동기를 얻어

                                                     1913년에 만들어 젔다,

 

                                                     인어상은 덴마크의 유명 발레리나를 모델로하여

                                                     에드바르드 에릭센(Edvard Eriksen)에 의해 만들어젔다,

 

                                                     키 약 80cm의 작은 동상이나 코펜하겐을 찾는 모든 관광객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한해 약 150만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온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외스터 포터역에 내린뒤

                                                     해변까지 걸어가면 된다,

 

                                                     몇 차례에 걸처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계속 복원 되었으며

                                                     카스텔레트 성채터에서 해안을 따라 약 300m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코펜하겐의 인어상과 거의 똑같은 인어상을 한강 에서도 볼수있다,

                                                     코펜하겐시와 서울시가 2014년 맺은 우호도시 협약으로

                                                     코펜하겐 시로부터 인어상 모조품을 기증받아 한강변 여의도 물빛광장에

                                                     설치 하였다,

 

                                                     2016,10, 24,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 "프랑크 옌센" 코펜하겐 시장등이

                                                     참석한 가온데 "한강에서 만난 인어공주" 제막식을 갖고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 동상은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의 저작권자인 "에르바르드 에릭센"가(家)에서

                                                     직접 제작 한것으로 높이 150cm, 무게 150kg으로 오리지널의 80%크기이다,

 

                                                                                                     2017, 2, 9, 촬영,





                                                                                      섹스피어가 <햄릿>을 구상한 데마크 크론버그 성


                                                  크론버그성 (Kronborg  Castle)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북쪽 작은항구 헬싱게아에  위치 하고 있으며

                                     항구 평지에  위치하여 난공불락의 위엄을 지닌 요새는 아니지만 섹스피어가

                                     "햄릿" 을 구상한 곳으로 유명하며 일명 햄릿성으로 불린다,

 

                                     크론버그성 에서는 섹스피어 사후 매년 여름 연극 "햄릿" 이 공연되고 있으며

                                     햄릿에 출연한 배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 비비안니를 비롯해서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벽면 가득 하다,

 

                                     그러나 섹스피어가 이곳 크론버그성에 왔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느곳 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피어는 크론버그성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햄릿에 등장하는 명대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대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에게도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크다,

 

                                     헬싱게아는 서기1100년경 조성된 항구도시로 마주보이는 스웨덴의 헬싱버그 와는

                                     불과 5Km 거리이며 이곳은 발트해와 북해를잇는 오직 하나의 통로인 해협이다.

 

                                     1429 년 에릭7세 왕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세를 징수하기 시작하여

                                     경제적 요충지가 되었다. 성의 벽면에 장식된 남녀신상의 조각과 문위나 기둥

                                     모서리의 주술적 괴면상의  릴리프가 햄릿을 불러 내기에 충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 7, 16, 촬영,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에 있는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 기념비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 기념비가 있는광장               

                                                Madrid Plaza de España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에스파냐 광장은 마드리드 최고의

                                                번화가인 그란 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30년 〈돈키호테〉로 잘 알려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다.

                                                기념비 중앙에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산초 판사의 청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것은 저녁해가 반뼘도 남아있지 않은 석양무렵 이었다,

                                                세르반테스 동상은 주변 고층빌딩에 포위당한 느낌 이었고 고층빌딩의 그림자가

                                                세르반테스 동상을 한입에 삼켜버린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세르반테스동상 당나귀 주위를 맴돌며 기념사진을 찍고있었다,

                                                여행가이드는 이곳에 손기술 좋은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는곳이라

                                                가방과 주머니 단속을 잘 해야한다고 당부했다, 해가 지면 주변 울창한 나무들의

                                                어스름한 검은그림자가 시야를 막고있어 더욱 조심해야한다 주의를 주었다,

                                              

                                                                                           2017, 11, 17,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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