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무술년 설날
남산골한옥마을 소경
설날 남산골한옥마을의 이런저런 소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옛날 이곳은 수도경비사령부가 있던 터인데 이제 서울시민의
훌륭한 휴식공간이 되었다, "남산골" 이란 단어를 떠 올릴때마다
이희승의 수필 <딸각발이>가 떠 오르곤한다,
남산밑 남산골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선비촌 이었나 보다,
이희승의 수필 <딸각발이> 일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
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2018, 2, 16, 촬영,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리고 이태백의 <장진주사> 와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남산골 한옥마을 장독대에 한지로 만든 종이 모형 커다란 장독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쓰여 있기를 <불취무귀> 라 써있었다,
술,, 이야기를 하려면 중국의 이태백을 빼놓을수 없는데 그는 <장진주사>(將進酒辭)
라는 권주가 에서,,~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천상에서 나와 다투며 바다에 흘러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거울을 보는 안방 마나님의
아침에는 靑絲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과 희어진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그리하여 인생에 뜻을 얻으면 모름지기 기쁨을 다 누려야하는 것,
황금 술독을 빈 채로 달 앞에 놓아서는 안되지. 하늘이 내 재능을 낳았으니
반드시 쓰일 데가 있으리라, 천금을 다 써도 본래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니,
양 삶고 소 잡아 한바탕 즐겁게 놀자꾸나. 모름지기 잔 들면 한꺼번에 300 잔은 기울어야지."
라고 했고 한국의 근 현대 문인중에서는 술과 관련하여 자칭 국보 1호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박사를 빼놓을수 없을것인데,,
무애 양주동 박사는 내가 학창시절 존경했던 은사인 멘토 송영준교수가 무척이나 하늘처럼
우럴어보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수필집 <문주반생기> 에 이렇게 썻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것은 열살때 부터라 기억한다, 왜냐하면 11세 숙장시절에
나는 숙생들로부터 속수대신 술 한병씩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이미 사도의 상당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열한살 때에는 술맛을 상당히 완미하여 숙생들에게 술을 가져오되 좋은 술을
가져오라 강요하였고 그들을 벌할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병술로써 그죄를 속량케
하기가 일쑤였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 오나니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진리로 알 것은 다만 이것뿐,
나는 술잔을 입에다 들고
그대를 바라보며 탄식 하노라,"
"탄식 끝에 S를 여의고, 다음 K를 만난뒤도 나의 주량은 자꾸 늘어만 갔다,
왜냐하면 그즈음 청춘은 한창 서럽고, 인생은 그저 외롭고, 사랑도 차츰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라고 적고 있다, 무애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떠 올리며 조선조 효심이 지극했던 왕으로 넓리 알려진 정조대왕의 권주가
사자성어 <불취무귀>를 이곳 남산골한옥마을 종이 항아리에서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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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건배사 / 불취무귀(不醉無歸)
不醉無歸 :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불취무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正祖 34卷, 16年(1792 壬子 / 청 건륭(乾隆) 57年) 3月 2日(辛未) 1번째기사,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다.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라고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남산골한옥마을 관리사무소
저마다 소원을 써서 새끼줄에 매달아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극단 <목화>의 길놀이 공연
연합뉴스TV에서 현장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