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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유적·문화재

창덕궁 만첩홍매화

 

 


창덕궁 만첩홍매화

 

창덕궁에 만첩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한걸음에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만첩홍매화는 5%덜 핀 만개 직전 상태였다,

푸르게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세찬 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날리는 고약한 날씨였다, 눈발은 곧 그첬다,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함양문앞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자리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 있었다,

 

그러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28)에 없어지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七分序), 6각 누각인 삼삼와(三三窩)와 승화루(承華樓)가

남아 있는데 바로 그 칠분서와 삼삼와 앞에 아주 귀한 진분홍의

<만첩홍매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만첩홍매화는 마치 홍역의 열꽃처럼 볼그레하게 활짝 피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온통 사로 잡는다,

 

이 만첩홍매화는 400여년전 선조임금때 명나라에서 조선에 선물로

보내온 것이라 하며 원래의 나무는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새 싹이 돋아 오늘의 고목이 되었으며 매년 이른봄 이맘때

아름다운 만첩홍매화(겹홍매화)꽃이 피어 새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만첩홍매화는 흔히 쉽게 볼수없는 매우 귀하고 귀한 홍매화 이다,

 

2025, 3, 29, 촬영,

 

 

 

 

만첩홍매화

 

 

 

 

 

 

 

 

 

 

 

 

 

 

 

 

 

 

 

 

 

 

 

 

 

 

 

 

 

 

 

 

 

 

 

 

 

 

 

 

희우루

 

희우루는 창덕궁 성정각에 부속된 누각으로 창경궁에서

창덕궁 으로 넘어가는 함양문을 지나 오른쪽편 담장안에 있다,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 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에는 내의원으로

사용 되기도 하였다, 성정각(誠正閣)은 단층 이지만 동쪽으로 직각으로

꺽인 2층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 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성정각 옆 희우루에는 벚꽃이 활짝피어 봄의 운치를 더해주고

담장밖 붉은빛이 감도는 분홍의 탐스런 매화는 만첩홍매 이다,

 

 

 

 

 

 

 

 

 

창덕궁 낙선재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樂善齋)를, 이듬해에는 석복헌(錫福軒)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였다.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은 8세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힘겨루기를 하며

세도정치를 하고있었다.

 

헌종은 15세가 되어서야 제대로 국사를 보게 되었는데 첫 왕비인

효헌왕후 김씨가 16세 나이로 세상을떠나  새 왕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헌종은 왕비후보로 간택된 규수 3명중 김씨처녀를 보고 한눈에 좋와했다.

그러나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사랑하는 김씨 처녀를 두고

남양홍씨인 효정왕후가 두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효정왕후가 3년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헌종은 김씨 처녀를

후궁으로 맞아 들인다. 그분이 바로 경빈김씨 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과 왕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헌종은 자신이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하던 낙선재옆에 석복헌(錫福軒)을짖고

사랑하는 경빈김씨를 머물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뒤 23세꽃다운 나이로 헌종이 세상을 뜨고 경빈김씨는

낙선재에서 쫏겨났다.

 

후궁을 위해 궁궐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낙선재에는 왕비나 후궁, 상궁들이 읽던 많은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모두 84종 2,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물량의 책이다. 이 중 700여권은

중국책 번역본이고 1,300여권은 한글창작소설류 이다. 이렇게 낙선재에

보관되었던 소설을 "낙선재본소설' 이라 칭하는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 되어있다.

 

특이한점은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 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 에서는 영왕의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 하였다.

 

낙선재 후원은 오랜동안 베일에 싸인 개방하지 않은 비밀스런 공간 이였는데

낙선재가 건축된 1847년 으로부터 무려 167년이 지난후  일반에게 공개 개방

하였으니 실로 역사적인 일이다.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원형의 만월문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하였다.

樂善齋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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