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물의정원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398,
촬영지 안내 / 승용차 / 네비 "물의정원" 검색 / 양수리에서 양수대교 건너지
말고 직진 운길산역 지나 200m 지점 우측 강구조 활처럼 생긴다리
보이는곳에 주차하고 도보 3분 다리 건너면 강가에 양귀비 정원이 보임,
전철 / 경의중앙선 "운길산역" 1출구 하차 도보 10분거리,
양수리 "물의정원" 하상부지에 양귀비가 지금 한창 이다,
양귀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화려하고 예쁜꽃 이다,
중국 당나라 양귀비가 정말 저 꽃과 같이 예뻤을까 한번 상상해 본다,
양귀비의 신장은 155cm, 체중은 65kg의 건강한 체형 이었다 전한다,
요즈음 미녀의 기준에는 턱없는 체형 이지만 당시에는 통통하고 복실복실한
몸매가 미인의 기준 이었나 보다,
양귀비는 고혹적으로 예쁜꽃 인것은 틀림 없으나 고귀 하거나 고상한
지적인 품격이 느껴 지지는 않는다,
"양귀비"(楊貴妃, 719, 6, 26,~756, 7,15,)는 당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 였다,
그녀의 성은 양(楊) 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안녹산과 사사명 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대표가 함께 주도한 반란,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중 한명으로 손꼽히니 절세가인
인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756, 7,15,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옥환 에게
자살을 명 하였고 고력사에 의해 양옥환은 목매달아 죽는 슬픈 운명을 맞았다,
양수리 물의정원에 핀 화초용 꽃양귀비 모습이다,
꽃 양귀비는 대공이 생기지 않아 마약의 원료가되는 진액을 채취할수 없다,
당나라 황제 현종은 사랑하던 양귀비를 잃고 슬픔에빠저 지내던 어느날
왕비처럼 예쁜꽃을 발견했고 그 꽃이름을 양귀비라 하였다 .
당나라시인 백거이의 "장안가"는 왕비가 되었으나 반란군에 처형되는
양귀비의 일생을 그리고있다,
2018, 6, 24, 촬영,
한나라 원제때의 왕소군(王昭君)은 절세의 미녀였다,
원제는 궁녀가 하도 많아 일일히 얼굴을 볼수 없었다,
그는 화공을 시켜 궁녀의 얼굴을 그려 바치게 하고는 마음에드는 궁녀를 낙점 하였다,
궁녀들은 당시 궁중화가 였던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면서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그려줄것을 간청 하였다,
그러나 도도했던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몹시 추하게 그려 임금에게 보였다,
그녀는 당연히 임금을 가까이 에서 모실 기회가 한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나라는 흉노 문제로 늘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때 마침 흉노왕 호한야가 한나라의 미녀로 왕비 삼을 것을 청하므로
원제는 못생긴 왕소군을 그에게 주기로 하였다,
막상 왕소군이 오랑캐땅으로 떠나려고 예를 올릴때 보니
그녀는 여러 궁녀들 가온데 제일가는 미인 이였다,
그녀가 뇌물을 쓰지 않아 모연수가 그녀의 얼굴을 추하게 그린 사정을
뒤늦게 안 왕은 격노하여 모연수를 죽여 버렸다,
그녀는 쓸슬히 흉노땅에 들어가 마음에도 없는 오랑케의 후궁이 되었다,
당나라때 시인 동방규(東方逵)는 왕소군이 떠나는 모습을 시한수로 남겼다,
왕소군 옥안장에 올라 타는데
말 타자 붉은 빰엔 눈물 흐른다,
오늘은 한나라 궁녀의 몸이
내일 아침 오랑캐땅 첩의 신세라,
참고문헌 정민 저 / 한시미학산책 p151 /휴머니스트
촬영장에서 우연히 오랫만에 만난 서송 김재호 사진작가가 몰카로 촬영해 내게 보내준 내 모습
2018, 6, 25,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