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 김영한 보살과
백석 그리고 길상사
1, 백석은 1912, 7, 1,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번지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의 어릴때 이름은 백기행 이였고 오산 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할때 까지
백기행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백석은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13살되던 1924년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1926년 오산고보로 승격 되었다.
오산학교 졸업생 중에는 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 제헌 국회의원 겸 교육자 주기용,
한경직 목사 와 함석헌 선생, 의사 백인제, 시인 김억과 김소월, 화가 이중섭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오산학교의 오산 이라는 이름은 남쪽의 남산, 남서쪽의 천주산, 서쪽의 제석산, 동쪽의 연향산
등이 있어 이다섯 봉우리의 산에서 유래 하였다.
백석은 1929, 3, 5, 오산고보를 졸업 하였고, 그해에 평남 대동군 출신 황순원은 오산고보에
입학 하였다.
백석의 선배인 소월은 1915년 오산학교에 입학 12회로 졸업하고 오산 4회 졸업생인
김억을 따라 경성으로 갔다.
백석은 1930, 4,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1934, 3, 6,졸업후 귀국
1934, 4,월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 했다.
2,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던 해에 채만식이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고,
12, 24, 김소월이 세상을 떳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백석은 선배 김소월을 마음속 깊히 흠모하고 있었지만 생전에 소월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조선일보 근무중 허준 이란 친구를 알게되고 허준의 결혼축하 회식 자리에서
통영의 박경련 이란 처녀를 알게되어 사랑에 빠진다.
백석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꼽으라면 1935 ~1941까지 7년간 이라 할수 있으며,
이때 시집 "사슴" 등 많은 시를 발표했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젖다.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백석의시집 "사슴" 은 1936,1,20,경성의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 되었다.
이때 백석 나이 24살 이였다.
3, 한편 1935,12, 23, 조선 권번의 기생 하나가 종로 경찰서를 찾아 요릿집에서 어렵게
번돈 65원 32전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 놓았는데 그 여인이 김진향 이란 여인인데
그가 바로 훗날의 자야 김영한 보살이다.
1936년 4월,조선일보사에 사표를 낸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부임 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문학평론가 백철도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가 되었고, 시인 김동명은 일찍부터
영생고보 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훗날 백석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소설가 한설야도 함흥에서
활동중 이였다.
4, 1936년 크리스마스 축제를 앞두고 4학년 학생들을 주축으로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고 백석이 총감독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친후 영생고보 동료교사 이임 송별회를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 에서 갖게 되었다.
요릿상과 함께 술자리 시중을들 아가씨 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함흥권번 소속 기생들 이였는데 가름마를 얌전히탄 아가씨 하나가 백석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아가씨의 예명은 김진향, 그가 훗날 백석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될 자야 인데 백석과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이때 백석 나이 26세, 진향은 22세 였다.
5, 두사람은 이후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95년 문학동네 에서 출간된 "내 사랑 백석" 에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한편 백석이 마음에 두고 있던 통영처녀 박경련은 백석의 절친했던 친구 신중현과 1937년 봄 결혼 하였다.
"내 사랑 백석" 에 따르면 그무렵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경성으로 가서 장가를 들었고 열흘 후 쯤
함흥으로 돌아와 자야를 만나 토라질 대로 토라진 자야를 위로하며 만주의 신징 으로가서 살자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화가난 자야는 백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백설 몰래 짐을꾸려 경성으로 와서 청진동에
집을 마련 하였다. 백석은 수소문 하여 자야의 거처를 알아내고 남산 아래 찻집 구로네꼬 에서
자야를 만나 자야의 청진동 집으로 와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함흥으로 떠나기 전
백석은 자야에게 누런 미농지 봉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백석이 쓴 시한편이 들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였다.
6, 백석은 "나와 나타샤 와 흰 당나귀'를 그 무렵 소설가 최정희 에게도 보냈다.
이 사실은 최정희의 딸인 소설가 김채원이 2001년 "문학사상' 9월호에 편지와
함께 공개함으로서 세상에 알려 젖다. 백석이 여섯살위 최정희 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받아 주지 않자
이시를 보냈던것으로 보인다. 당시 최정희는 도꾜 유학시절 만났던 연극인 김유영과 이혼한 상태의
젊고 예쁜 소설가였다. 그녀는 당시의 연인 "파초"의 시인 김동환이 편집인겸 발행인 으로있던
"삼천리 문학' 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잡지는 최정희 와 시인 모윤숙이 청탁과 편집 실무를 맡고 있었다.
이무렵 이상 도 최정희에게 관심을 보인것 같다. 최근 문학평론가 권영민이 이상의 편지를 발굴
공개했는데 여기에 최정희에게 쓴글이 있다. "까닭도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 지려한다. 정희야,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나는 진정 네가 좋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가 좋다" 이렇게 썻다. <오감도>, <날개>, <종생기>를 쓴 천재 이상 은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친척 변동림 과 살다 1937년 4월 17일 도꾜 제국대학교 부속병원에서
28살에 요절 했다, 이상 의 임종과 관련된 기록은 현재 두개가 있다. 이상의 부인 변동림 과
당시 도꾜에 머물던 친구 김소운 이 남긴 기록이다. 1986년 "문학사상" 5월호 변동림의 글,
1968년 간행한 "하늘끝에 살아도" 의 "이상이상" 이란 김소운의 글이 그것이다.
그가 죽기 한달전쓴 소설 "종생기" 는 주인공이 정희다.
최정희는 김동환 과 결혼 지원, 채원 자매를 소설가로 키웠다.
나타샤는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 에 등장하는 이름이며 푸슈킨의 부인 이름도 나타샤 였다.
나타샤는 러시아 여성들이 많이 쓰는 이름중 하나이다.
청진동 집에서 백석과 자야는 1938, 12,부터 1939,12월 까지 1년 남짖 동거 생활을 하였고
그무렵 청진동 집에는 함대훈, 아동문학가 방정환, 영화감독 박기채, 등이 들락 거렸고 같은 시기
이상 은 종로 우미관 뒤에서 기생 금홍과 동거중 이였다.
7, 어느날 저녁, 저녁 식사후 백석은 자야 에게 미농지와 먹지 그리고 볼펜을 갖어오라해
소반을 놓고 두장의 문서를 썼다. 하나는 영생고보에 보내는 사표였고 다른 한장은
조선일보에 보내는 입사원서 였다고 자야가 훗날 술회한바 있다.
1939, 1, 26, 백석은 조선일보 출판부에 다시 입사하여 <여성>지 편집주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백석이 소설가 박종화 에게 보낸 원고 청탁 편지가 이태준의 "서간문 강화" 에 실려있다.
백석과 자야의 동거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8살 젊은 백석을 그의 부모가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39, 12, 24, 출근한 백석은 자야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열흘후 백석은 청진동의 자야 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충북 진천에 가서 선을 보고 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청진동으로 돌아온 백석은 자야 에게 나는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다 라고 말했지만 동거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엿다.
8, 그 무렵 자야는 "김숙" 이라는 필명으로 1939년 삼천리 6월호에 <덕왕의 인상> 과 <취객>
이라는 두편의 짧은 수필을 발표 하였다. 자야는 역겹고 힘든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 하려고
작심하고 중국 상해로 떠나려 했다.
때마침 찾아온 백석은 자야 에게 신징으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했으나 자야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눈물을 펑펑 쏟는 자야를 뒤로하고 백석은 뒤도 돌아 보지않고 자야 에게서 멀어저 갔다.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 이었다. 1939년이 그렇게 저물었다.
9, 1939,10, 21, 백석은 결국 조선일보사를 사직했다.
이후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 조치
되었다. 백석은 일제의 강압 으로부터 피신할 곳으로 만주를 선택 1940, 2월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에 도착 한다.
한편 자야 여사는 백석이 만주로 떠난뒤 명륜동 집에서 한시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1940, 2, 7,일 섣달 그믐날 집을 관수동으로 옮겼다.
그후 자야 여사는 송지영이 신징 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백석에게 검정 두루마기 한벌을
보냈고 백석은 그걸 입고 다녔다고 훗날 송지영이 증언 하였다.
10, 백석은 1941년 <조광> 4월호에 <귀농> 이라는 시를 발표 했는데 이당시 백석은 국무원
경제부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작정 이였다. 만주에서 방황하던 백석이 잠시나마
생활의 안정을 취하게 되는것은 1941년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 하면서 부터다.
문경옥 과의 결혼 생활은 1년 남짖 이였는데 훗날 북한에서 백석의 마지막 부인이된 리윤희 의
편지가 공개됨으로서 세상에 알려젖다.
문경옥은 평양의 부유한 변호사 문봉의 의 딸로서 백석과 이혼후 북한에서 유명한 작곡자 이자
피아니스트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 문경옥은 훗날 한국 전쟁중 월북한 작곡가 리건우 와
결혼 했고 평양음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 무렵 백석은 "시라무라 기코" 로 창씨개명 하였다고
김응교가 공개한 "문인 창씨록' 에 기록되어 있다.
11, 한편 자야 여사는 1944년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관광 엽서의 모델로 등장했다.
궁중무용 "춘앵전" 을 추는 모습으로 이그림은 장면 박사의 동생 장발 화백이 그렸다.
그후 해방이 되었고 백석은 1945, 12, 29, 평양에서 리윤희와 결혼식을 올렸다.
백석은 34, 리윤희는 20살, 그들은 대동강 부벽루 근처에 신혼 살림을 꾸렸다.
12, 백석의 시가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된것은 1948,10월 <학풍>창간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이였다. 학풍은 을유문화사 에서 간행하던 종합 교양지로
발행인은 윤석중, 편집국장 조풍연 이였다. 백석이 유동 이라 쓴 지역은 남신의주역
부근의 유상동 으로 1991년 행정구역 개편때 유상 1동과 유상 2동으로 분리 되었다.
1950, 6, 25,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요정을 차렸다.
이 내용은 고은 의 <1950년대>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요정을 경영 하면서 중앙대 영문과를 나온 미녀 김숙의 요정은 신익희, 조병옥,
신성모, 이범석등이 들락 거리는 거물들의 사교장 이였다.
13, 백석은 장남 백화제(1946년 출생), 딸 지제(1951년 출생), 둘째아들 증축(1955년 출생)
삼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무렵 북 에서의 백석에겐 점점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원우등 문인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 1959,1월 마침내 48살 백석은 현지 파견이라는
미명아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관평 협동조합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수군은 양강도 중부 압록강을 끼고 있는곳으로 북한에서도 제일 추운곳 중 하나다.
백석은 이곳에서 축산반에 배치되어 양치는 일을 돌보다 1996년 1월, 85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가 마음속에 사랑했던 통영처녀 박경련은 2006년 사망했다.
14, 백석의 연인 자야여사는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 이라는 커다란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당대의 거물 정치인, 경제계등 막강한 거물 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1996년 자야 김영한 보살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대원각 7000여평의 터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뒤 대원각 요정은 길상사 가 되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 유골은 그녀의 유언대로 한겨울
눈이 내리던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젖다.
김영한 자야 여사는 정식으로 결혼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 하나, 딸하나를 남겼다.
주 ; 여기 글은 백석 관련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 하였고
특히 "안도현" 저 "백석평전" 을 주로 참고 인용 하였음을 밝힌다.
2014, 7, 18, 길상사 촬영하고 상록수 글씀,
길상헌 전경
법정스님이 머무르셨던 진영각
자야 김영한 보살 공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