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충청수영성
주 소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 외
내 용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보령 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4일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2만 5,326㎡로,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변루(待變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와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5개, 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진남문(鎭南門)· 만경문(萬頃門)· 망화문(望華門)·
한사문(漢舍門) 등 4문은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의 아치형 석문(石門)만이
남아 있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2020, 6, 18, 촬영,
영보정 전경
충청수영성은 오천항에 도착해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충청수영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아 바다로 접근하는 적을
관측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충청수영성은 사적 제501호로 지정된
조선 초기 사령부였다. 세종 29년인 1447년 대마도 정벌과 함께 수군과
기지를 정비하고 충청수영성의 체계를 갖추었다. 왜구의 침탈을 막고
한양으로 가는 선박을 보호했다 전해온다.
영보정 후면
영보정 정면
영보정(永保亭)의 영보(永保)는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천험(天險), 인화(人和), 정관지락(亭觀之樂)을 영원히 보존한다는 의미이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군우국지의(忠君憂國之意)를 담고 있다.
영보정 내부에 걸려있는 각종 편액들
최고의 명당자리에 영보정이 위치하고 있다,
영보정은 충청수영성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영보정은 연산군 11년인 1504년 수사로 부임한 이랑이 건축했다고 한다.
이후에 다산 정약용이 영보정의 아름다움을 '영보정유기'를 지어 남겼다
진율청 전경
서문을 지나 성벽을 오르면 진휼청이라는 팔작지붕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수영의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목적으로 곡식을 꾸어주고 거둔 곳
이라한다. 충청수영이 폐영된 뒤에는 민가로 사용되었다,
팔작지붕 형태에 온돌방 등을 갖추고 있다,
수영성 둘레길에서 바라본 오천항 전경
오천항은 천수만 바다가 호수처럼 만들어져 있는 항구이다.
여기에 충청수영성은 오천항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역사적인 장소라 할 수 있다.
수영성 성곽에서 바라본 오천항과 오천면 소재지 풍경
키조개
오천항 부근 바다에서는 요즈음 키조개가 많이 잡혀
오천항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고있다,
키조개의 크기는 각장 145㎜, 각고 200㎜, 각폭 100㎜이나,
아주 큰 것은 각고가 360㎜ 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남해안과
서해안이 분포지역이다, 서식장은 내해나 내만으로서 조간대(潮間帶)
에서부터 30m 되는 데까지 사이의 이질(泥質)인 지질 속에 잠입하여
생활한다.
키조개는 난생형(卵生形)으로서 산란기인 초여름에 산란한 알은
해수중에서 수정한 다음 발생하여 2∼3주일간 부유생활을 하고,
곧 족사(足絲)로써 부착생활로 들어가나 그 부착력은 강하지 않다.
부착생활 기간은 환경에 따라 다르나 약 1∼2개월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저질 속에 잠입하여 생활한다.
서쪽 망화문터에 남아있는 아치형 석문(石門)
소성마을의 역사비
충청수영성이 있는 오천항에서 가까운 교성리에 있는 아담한 농가주택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