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와 백석
성북구 성북동에는 문학적 이야기가 곁들어 있는 사찰이 하나 있다,
아름답고 운치있는 사찰 길상사가 그곳이다, 어느 깊어가는 가을날
길상사 계곡 벤치에 앉아 핏빛으로 물든 단풍을 감상하는 여유와 낭만은
행복한 추억이 되기에 충분하다,
길상사는 1987 년 길상화 김영한 보살이 법정스님께 대원각 대지 7천여평과
지상건물 40 여동등 부동산 전체를 사찰로 기증할것을 제의 1997년 5월 대원각
부동산 일체를 등기이전 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분원이 되었다.
길상사 시주 김영한보살과 월북시인 백석과의 로맨스는 넓이 알려저 있다,
1936년 4월, 조선일보사에 사표를 낸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부임 하는데, 크리스마스 축제를 앞두고 4학년 학생들을 주축으로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고 백석이 총감독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친후 영생고보
동료교사 이임 송별회를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 에서 갖게 되었다.
요릿상과 함께 술자리 시중을들 아가씨 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함흥권번 소속
기생들 이였는데 가름마를 얌전히탄 아가씨 하나가 백석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아가씨의 예명은 김진향, 그가 훗날 백석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될 자야 인데
백석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이때 백석 나이 26세, 진향은 22세 였다.
두사람은 이후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무렵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장가를 가라는 강요를받고
있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의 신징 으로가서 함께 살자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화가난 자야는 백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백석 몰래 짐을꾸려 경성으로 와서
청진동에 집을 마련 하였다. 백석은 수소문 하여 자야의 거처를 알아내고 남산 아래
찻집 구로네꼬 에서 자야를 만나 자야의 청진동 집으로 와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함흥으로 떠나기전 백석은 자야에게 누런 미농지 봉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백석이 쓴 시 한편이 들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였다.
나타샤는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 에 등장하는 이름이며 푸슈킨의 부인 이름도
나타샤 였다. 나타샤는 러시아 여성들이 많이 쓰는 이름중 하나이다.
청진동 집에서 백석과 자야는 1938, 12,부터 1939,12월 까지 1년 남짖 동거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저녁, 식사후 백석은 자야 에게 미농지와 먹지 그리고 볼펜을 갖어
오라해 소반을 놓고 두장의 문서를 썼다. 하나는 영생고보에 보내는 사표였고
다른 한장은 조선일보에 보내는 입사원서 였다고 자야가 훗날 술회한바 있다.
백석과 자야의 동거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8살 젊은 백석을 그의 부모가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39, 12, 24, 출근한 백석은 자야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열흘후 백석은 청진동의 자야 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충북 진천에 가서 선을 보고 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청진동으로 돌아온 백석은
자야 에게 나는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다 라고 말했지만 동거생활이 순탄할리 없었다,
그 무렵 자야는 "김숙" 이라는 필명으로 1939년 삼천리 6월호에 <덕왕의 인상> 과
<취객> 이라는 두편의 짧은 수필을 발표 하였다. 자야는 역겹고 힘든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 하려고 작심하고 중국 상해로 떠나려 했다. 때마침 찾아온 백석은 자야 에게
신징으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했으나 자야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눈물을 펑펑 쏟는 자야를 뒤로하고 백석은 뒤도 돌아 보지않고 자야 에게서 멀어저 갔다.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 만남 이었다. 1939년이 그렇게 저물었다.
1939,10, 21, 백석은 결국 조선일보사를 사직했다.
이후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 조치
되었다. 백석은 일제의 강압 으로부터 피신할 곳으로 만주를 선택 1940, 2월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에 도착 한다.
한편 자야 여사는 백석이 만주로 떠난뒤 명륜동 집에서 한시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1940, 2, 7,일 섣달 그믐날 집을 관수동으로 옮겼다. 그후 자야 여사는 송지영이
신징 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백석에게 검정 두루마기 한벌을 보냈고 백석은 그걸 입고
다녔다고 훗날 송지영이 증언 하였다.
훗날 해방이 되었고 백석은 1945, 12, 29, 평양에서 리윤희와 결혼식을 올렸다.
백석은 34, 리윤희는 20살, 그들은 대동강 부벽루 근처에 신혼 살림을 꾸렸다.
백석의 시가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된것은 1948,10월 <학풍>창간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이였다. 학풍은 을유문화사 에서 간행하던 종합 교양지로
발행인은 윤석중, 편집국장 조풍연 이였다. 백석이 "유동" 이라 쓴 지역은 남신의주역
부근의 유상동 으로 1991년 행정구역 개편때 유상 1동과 유상 2동으로 분리 되었다.
1950, 6, 25,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요정을 차렸다.
당시 요정을 경영 하면서 중앙대 영문과를 나온 미녀 김숙,, 자야의 요정은 신익희,
조병옥, 신성모, 이범석등이 들락 거리는 거물들의 사교장 이였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백석은 장남 백화제(1946년 출생), 딸 지제(1951년 출생),
둘째아들 증축(1955년 출생) 등 삼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무렵 북 에서의
백석에겐 점점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원우등 문인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
1959,1월 마침내 48살 백석은 현지 파견이라는 미명아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관평 협동조합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수군은 양강도 중부 압록강을 끼고 있는곳으로 북한에서도 제일 추운곳 중 하나다.
백석은 이곳에서 축산반에 배치되어 양치는 일을 돌보다 1996년 1월, 85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한편 백석의 연인 자야여사는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 이라는 커다란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당대의 거물 정치인, 경제계등 막강한 거물
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1996년 자야 김영한 보살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대원각 7000여평의 터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뒤 대원각 요정은 길상사 가 되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 유골은 그녀의 유언대로 한겨울
눈이 내리던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젖다. 김영한 자야 여사는 정식으로 결혼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 하나, 딸하나를 남겼다.
나는 길상사를 갈때마다 나무그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세사람의 인생역정을 생각한다,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법정스님, 당대의 뛰어난 문학가 백석시인, 그리고 비련의 여인
자야 김영한보살,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답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저본다,
2018, 9, 11, 글쓰고 촬영,
길상사 극락전
내가 길상사 극락전에 도착 했을때 스님의 구성진 독경소리와 함께
한사람의 영혼을 구천에서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는 49제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과연 삶은 무었이고 죽음이란 무었인가? 라는 의문이 새삼 들었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고뇌하고 번민에 멱살이 잡혀
신음하고 있다, 어쩌면 삶이란 기쁨도 슬픔도 아닌것이며 그 벼랑의 경계에
늘 서있는것은 아닐까 생각 되었다,
길상사 지장전
관세음보살상
길상사 극락전 앞마당 한구석에 관음상 돌조각상이 서있다,
이 조각상을 조각한 사람은 전 서울미대 최종태교수이다,
독실한 카돌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교수에게 법정스님이 관음상을
조각 의뢰한 것은 불교와 카돌릭간의 화합을 도모 하기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관음상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젊은 수녀를 닮은듯한 느낌을 받는다,
참고로 최종태교수가 참여하는 2018년 제8회 <상(像)미술회전>이
2018, 9, 12(수) ~ 9,17(월)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에서 열린다,
오프닝행사 / 2018, 9, 12,(수) 18시
길상사 진영각에 모셔저있는 법정스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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