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릉
정릉은 서울 성북구 정릉에 있으며,
정릉은 조선 제1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신덕왕후는 상산 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의 계비이다.
신덕왕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 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 였으나 태조 즉위전인 1391년 세상을 떳기 때문에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사이의 장성한 여섯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했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태조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하게 사랑했다 전한다.
1396년 병환으로 승하 하였으며, 태조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하여
흥천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찾아가는길 / 전철 1호선 신설동 역에서 지난 2017, 9, 2, 개통한 우이신설 도시철도(경전철) 환승
정릉역 하차 도보 10여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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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에 따라 2009, 6,30.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 까지 이어저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정릉에서는 매년 9, 23, 신덕왕후의 기신제가 열리고 있다,
정릉은 1409 년(태종 9) 도성안에 있던 정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1669 (헌종 10) 정릉으로 복권 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 되었다,
2017, 9, 16, 촬영,
정릉 재실 복원에 대하여
1960년대 멸실되었던 서울 정릉의 재실(齋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을 3년에 걸쳐
복원 완료하고, 지난 2015, 3, 25,준공식을 가졌다,
정릉은 조선 제1대 왕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원래의 자리는
당시 도성 내였던 중구 정동 이었으며 규모도 현재보다 크고 화려 하였다.
하지만 태조의 정비(正妃)였던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1400년)하고
태조가 승하(1408년)하면서 1409년 현재 자리로 이장 되었고 그 규모도 대폭 축소 되었다.
이후 정릉은 폐허처럼 방치 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정비 되었고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으나, 초석만 남기고 1960년대 멸실 되었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능제복원 차원에서 2012년 재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 하였다. 조사를 통해 1788년에 발간된 춘관통고(春官通考)의 기록과 일치하는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발굴조사 결과와 사료를 바탕으로 2012년부터 3년간 정릉 재실의 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3개소)과 담장 등을 관계 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총 사업비 15억 원을
투입하여 복원 하였다.
문화재청은 재실 복원을 통해 조선 왕릉이자 세계유산으로서 정릉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한편, 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을 통해 그 본연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 실
제기고 와 재실
행랑채
정릉 관리소
정릉비각
정릉 / 신덕고왕후 강씨 능침
신덕왕후에 대하여
신덕왕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 했다,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 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1391년(고려공민왕 3)
세상을 떳기 때문에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 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원비 신의왕후 사이의 장성한 여섯 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 하는데 성공 했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다,
태조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 전한다,
1396년(태조5) 병환으로 승하 했으며 태조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해
흥천사를 세웠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뜨자 태조는 왕의 위엄도 생각하지 않고 통곡 했으며
상복을 입은채 안암동으로 행주로 직접 능 자리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신덕왕후가 위독 할때에는 내전에 승려 50여명을 모아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말년에는 사흘이 멀다하고 흥천사를 찾아 갔으며 심지어 "백관이 반열을 정돈
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로 거동 했다" 라고 태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태조에게 이렇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나 아버지 태조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태종이 신덕왕후를 좋아할리 없었다,
태종은 1409년(태종9) 2월 신덕왕후의 정릉을 정동에서 지금의 성북구 정릉
자리로 천장하고 그 석물은 광통교를 돌다리로 짓는데 사용했으며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나서 새삼 "강씨는 내게 조금도 은의가 없다" 라고 모질게
선언까지 하였다,
정릉 정자각에서 문화 해설사가 관람객에게 묘역에 대한 내력을 설명
정릉은 숲이 좋고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은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