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과흥천사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정릉 ; 서울 성북구 능길 74
전화 ; 02 - 914 - 5133
대중교통 ; 전철 4호선 길음역 2출구 국민대방향 도보 20분
<정릉>은 조선왕조 이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이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으며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
신덕황후의 부친은 상산부원군 강윤성이고 모친은 진산부부인 강씨이다,
강윤성은 고려 충혜왕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삼사사 문하찬성사 이었으며
신덕고황후가 조선의 왕후가 되자 국구로써 상산부원군에 봉해젖다.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전인 1391년 세상을 떳기때문에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원비 신의왕후 사이의 장성한 여섯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태조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한다.
1396년 병환으로 승하하였으며 태조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를 세웠다.
태조5년(1396년) 신덕왕후께서 병환으로 승하하자 태조께서는
몹씨 슬퍼하시여 제왕의 위엄도 잊고 통곡을 하였고 능지는
도성안 현재의 중구 정동 에 정하고 신덕왕후 봉분을 우측에
태조의 수릉은 왼쪽에 미리 정해 놓았다 한다.
태조가 승하하시고 건원능에 모시고 정릉은 1409년 태종 방원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 위치로 천장을 하였다.
정릉이 지금의 장소로 옮겨진후 210년이지난 선조14년(1581)에
정릉의 회복에 대하여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고 260년이 지난
현종10년(1899) 관중추부사 송시열의 건의로 종묘에 배향되었고
정릉이 회복되어 의례에 의한 위엄을 갖추고 능제를 올리게 되었다.
신덕왕후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태조의 뒤를 잇기를 바랐다.
정도전 ,남은 등 당대의 쟁쟁한 개국공신들이 자신의 편이였고
태조역시 자신의 뜻을 따랏으므로 차남 방석을 세자로 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1396년 신덕왕후는 갑자기 세상을떳고 2년뒤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 두아들은 무참히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흥천사
흥천사는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 인근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1397년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능지를 정릉에 정하고 그 원당으로 릉 동쪽에 170여칸의 절을세워 흥천사라 칭하였다.
1447년(세종29) 안평대군을시켜 사리각에 불골을 봉안하게 하였다.
1504년(연산군10) 12월에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5)에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다만 대종만은 덕수궁으로 옮겨저 지금까지 남아있다.
1669년(현종10)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로 절을 옮겨 짖고 신흥사라 이름을 고치었다.
1794년(정조18) 현재의 장소로 옮겨 크게짓고 1853년(철종4)에는 극락보전을 건축하고
1855년(철종6)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865년(고종2)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뒤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2014, 2, 4, 촬영,
정자각, 비각, 수복방,
비각 과 수복방
능 관리소
흥천사
흥선대원군이 직접쓴 현판(왼쪽) 국가등록문화재 제583호
흥천사 극락보전(서울시 유형문화재 66호)
흥천사 삼각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