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꽃무릇
길상사는 1987 년 길상화 김영한 보살이 법정스님께 대원각 대지
7천여평과 지상건물 40 여동등 부동산 전체를 사찰로 기증할것을 제의
1997년 5월 대원각 부동산 일체를 등기이전 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분원이 되었다.
1997.12.14. 역사적인 개원법회를 열었고 1998.1.1. 시민선방인 길상선원을
열었고 2, 14, 1차 주말수련법회 실시이후 도심속 수행정진 기도도량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무소유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던 법정스님은 강원도 오대산의 오두막에
기거하면서 가끔씩 길상사 법회에 참석 사자후로 설법을 강론 하셨으며
스님은 자신에겐 추상같이 엄격하고 신도들에겐 자애로운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자애로움을 보여주셨다,
맑고 향기롭게를 설법하던 노스님은 홀연히 2010,3,11,입적 하시어
서울 나들이때 머물던 길상사 행자실에 모셔젖다.. 스님은 평소의 당부에 따라
빈소도 마련치 않은채 승복차림 이였으며 분향소만 조촐히 차려젖다,
이승 에서의 말빚도 거두어 가겠다며 스님은 무소유책 출판을 중지할것을
요구 하였고 관도 거부한채 달랑 가사 한장에 덮힌 그의 법구는 그의 상좌들이
운구 극락전을 한바퀴 돌아 송광사로 옮겨진후 수많은 사부대중들의 슬픔속에
2010, 3, 13 장작불에 다비되어 사리도 수습하지 않은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법정.. 그 이름 만으로도 위안 이였으며, 설법 이였고 계율이였다.
현대 불교사에 법정스님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일찌기 없었다 생각한다..
법정스님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삶을 늘 동경 했으며 미국 마샤추셋주의
윌든 호반을 몇차례 다녀오기도 하였다,
법정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54년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송광사, 쌍계사, 해인사등에서 참선 수행하였고 2007년 폐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아왔으나 재발해 투병해 왔었다..
법정스님은 평소 고전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고 파비오 비온디가 지휘하는
에어로파 갈란테 연주의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아 와
골드베르그변주곡 글랜 굴드나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연주로 자주 듣곤 했다,
여기에 이해인 수녀의 슬픔에 잠긴 법정스님 추도시를 소개한다..
- 3월의 바람속에 -
차갑고도 따듯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 속에 정토로 떠난 스님
-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 - 하시더니
꽃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 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라시며
아직 보내드릴 준비가 덜된 우리곁을
냉정하게 떠나가신 야속한 스님
- 이하생략 -
2019, 9, 25, 촬영,
길상사 꽃무릇
- 상록수 -
꽃은 잎을 그리워 하지만
잎을 만날수 없고,
잎은 꽃을 그리워 하지만
결코 꽃을 만날수 없는 숙명,,
그게 어찌 꽃무릇 뿐이랴,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치 않던가,,
세상은 언제나 내가 원하지 않은 길로
빗나가지 않던가 ?
나는 그 확신에 가득찬
요염한 선홍빛 붉은꽃,
오만과 광기로 무장한
꽃무릇을 별로 좋와하지 않는다,
그 오래전 옛날
완행열차를 타고
늦은 저녁무렵
시골역에 내려본 적이 있는가,,
가부키 처럼 분칠을한 흰 얼굴에
입술 연지만 붉게 바른
여인들이 서성대던
역전앞 주점가,,
꽃무릇을 볼때마다
어린 시절 시골 역전앞
풍경이 생각 나곤한다,
너무나 강렬해서
눈이 멀것 같은 두려움,
너무나 요염해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처절한 공포,
전라의 몸으로 엄습해오는
뿌리칠수 없는 유혹,,
나는 에스터 로더를 통채로
뿌린것 같은 그 강렬함이 싫다,
그래도 꽃무릇의 계절이니
그를 만나러 그가 있다는
길상사로 새벽바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