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묘와 은행나무
연산군묘(燕山君墓) 와 은행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부인 신씨(愼氏)의 묘소
국가지정문화재 / 사적 제362호. 지정면적 1만4301㎡.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폭군연산> 이란 제목의 책이 신봉승 지음,
금성출판사에서 2015년 간행된적이 있다, 연산군에 대한 이미지는 먼저
폭군, 포악한 군왕 이라는 점이다,
연산군묘는 우이동 도선사 입구를 지나 종점에서 방학동으로 가는
고개를 넘어 우측편 아파트와 주택이 혼재 되어있는곳 공원옆에 있다,
연산곤묘 바로 아래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830년된 년로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받침대의 부축을 온몸으로 받으며 힘겹게 서있다,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 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 방학동으로 묘를 옮겼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
(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 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시설로는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 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향로석(香爐石)·
문인석(文人石)· 제실(祭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마(石馬)·
석양(石羊)· 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연산군지묘)’, 후면에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 부인 신씨의 묘비 전면에 ‘居昌愼氏之墓(거창신씨지묘)’,
후면에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六月二十六日葬(유월이십육일장)’이라
새겨져 있다.
2019, 10, 30, 촬영,
연산군묘와 역사를 함께한 노거수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높이 24m, 둘레9,6m, 수령 800~1000년이 되었으며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이다,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으며 이곳에 불이 날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좌 ; 연산군묘 / 우 ; 거창군부인 신씨묘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는 거창부원군 신승선의 딸로 성종 19년 (1488)에 왕세자빈으로 책봉 되었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군부인으로 강등
되었다, 중종 32년(1537)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 하였다,
연산군묘 뒤로는 봉분을 보호하기위한 곡장이 둘러처저 있고 봉분 앞쪽에는 좌우에 멍주석이 있고
제수를 차려놓기위한 돌로 만들어놓은 상석이 있으며 그 앞으로 장명등, 향로석, 문인석등이 있다,
연산군묘 아래에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묘가 있다
맨 아래편에는 연산군사위 구문경묘 와 연산군딸묘가 나란히 있다
연산군묘 아래 공원에 있는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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