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티쿰합창단
2019년 가을 연주회
가을의 길목에서
1, 일 시 / 2019, 9, 7,(토) 17;00
2, 장 소 / 서울 종로구 안동교회 (전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 50m)
경복궁옆 국립현대미술관과 정독도서관 사이에 위치
3, 레퍼토리 / 프란시스 폴랑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중심으로 교회음악,
4, 출연자 / 지휘자 ; 서광태, 칸티쿰합창단
5, 이날 음악회는 서광태 지휘자가 지휘하는 교회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칸티쿰합창단의 출연으로 시작부터 감동의 도가니였다,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Francis Poulenc)의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우리말로
"성모애상" 또는 "슬픔에 잠긴 성모" 가 주 레퍼토리였다,
"클로드 로스탕" 은 작곡가 풀랑에 대해 "깡패와 수도승 사이에 풀랑이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풀랑의 곡들에선 신비주의적 요소와 파괴적 위트가 모호한
형태로 같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풀랑은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5세 때부터 현대음악 연주자로 유명한 리카르도
비네스에게 배웠다. 18세에 불과한 1917년에 <니그로 랩소디>를 작곡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그는 1919년에 <프랑스 6인조>의 일원으로 가담하고,
쾨클랭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음악계를 지배하던 바그너와 드뷔시의 영향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성숙기인 1932년에 작곡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선 그의 특징인 매서운
위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프랑스 멜로디의 귀재였던 풀랑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곡을 쓸 때 가장 행복해 하였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반주의 성악곡만도 1백 곡이 넘는다.
<사랑의 길>, <동물시집>, <짧은 짚>등의 가곡집에는 폴 엘뤼아르, 장 아누이,
귀욤 아폴리네르, 코레트, 막스 야콥 등의 시가 매혹적인 형태로 녹아들어 있다.
또한 종교음악 <스타바트 마테르>(1950)와 오페라 <카르멜파수녀와의 대화>(1957),
<인간의 목소리>(1958)에서도 신비롭고 황홀한 멜로디의 예술을 드려놓았다.
성악곡 이 외에 4개의 협주곡(오르간, 하프시코드, 피아노) 역시 폴랑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5,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는 ‘성모애상’이라고도 부르며, 직역하면
‘서 있는 어머니’라는 뜻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서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성모 마리아를 위한 노래이다.
이러한 작품의 주제는 미술에 비유하자면 성모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13세기부터 내려오는 성모 마리아의 기도문을 가사로
해서 곡을 붙인 음악으로, 처음에는 단선율로 불렀으나 르네상스 이후 다성
음악이 발달하면서 점차 음악적으로 복잡하고 정교해졌으며, 예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가톨릭 음악의 수호자로 불리는 팔레스트리나부터 페르골레지와
비발디, 보케리니와 하이든, 로시니와 드보르자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대에
걸쳐 많은 음악의 거장들이 각자의 개성이 빛나는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하였다,
2019, 9, 7, 촬영,
안동교회 전경
안동교회가 자리한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동네로 서울이 조선 왕조의
도읍지로 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주거지로 형성되었다,
1908년 박승봉, 유성준 등을 중심으로 기호학교(지금의 중앙 중고등학교)가 설립
되었고, 그 이듬해인 1909년에 김창제의 집에서 안동교회가 시작 되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신앙과 교육에서 찾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안동교회는 설립되었다.
100년의 역사 가운데 안동교회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 배출하여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전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은 안동교회의 장로로 시무했으며,
제2대 윤보선 대통령은 선대로부터 안동교회와 마주하고 있는 자택에서 평생을
지내며 대대로 믿음을 쌓은 교우였다.
현재 안동교회는 한국 사회와 교계에 지도력을 가지고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28년간 시무하신 유경재 원로 목사의 뒤를 이어 황영태 목사가 12대 담임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칸티쿰합창단 지휘자 서광태
파사칼리아 / passacaglia
파사칼리아는 7세기경 스페인에 춤곡으로 처음 나타났을 때는 선율이 격렬하여
그다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17, 18세기에 프랑스 극장에 도입되면서 웅대한
성격의 춤곡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춤 동작이나 스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음악적으로 당대의 샤콘과 거의 구별되지 않지만, 당시 문헌들에는 파사칼리아가
좀더 진지한 성격의 춤곡이며 주로 남자들이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파사칼리아 춤과 샤콘 춤은 각기 같은 이름의 음악 형식을 낳았지만 당시 바로크
작곡가들은 두 형식의 명칭을 구별하지 않고 론도(반복 악구에 의한 곡)와 변주곡을 썼다.
오늘날 두 형식에 대한 정의 또한 다양하다.
소프라노 이윤주 / 비올라 최진미
소프라노 이윤주
비올라 최진미
비올라에 대하여
오랜동안 음악계에서 비올라는 바이올린의 명성에 묻혀 제대로 대접을
받지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리처드 용재오닐" 이라는
걸출한 비올리스트가 혜성처럼 나타나 비올라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비올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비올라는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소리에 비해 다소 허스키 하다고 할까
조금은 불투명한듯한 명쾌하지 못한 소리를 내준다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사용하는 비올라와 바이올린의 크기를 비율로 비교해보면
약 10 ;7 정도이다, 비올라의 크기가 바이올린보다 약간크다, 따라서 그
무게도 더 무거우며 비올라의 활은 더 굵고 무겁다, 그런 이유로 최저음이
바이올린 보다 5도정도 낮고 활과 줄의 차이등 여러요소들로 인해 비올라는
그 나름대로 특유의 소리를 내준다,
많은 음향학자들은 비올라가 음향학적으로 바이올린과 같이 균형감 있는
악가가 되려면 바이올린의 약 1,5배 크기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사용되는 비올라의 크기가 바이올린의 1,5배 보다 작아 다소
어설픈 소리를 내줄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는
그 독특한 음색을 지니고 있어 많은 음악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있다,
소프라노 이윤주
비올라 최진미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슬픔
페르골리시의 <스타바트 마테르>
Giovanni Battista Pergolesi / Stabat mater
바로크음악사에 가장 빛나는 위대한 작곡가중 한명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리시"
(Giovanni Battista Pergolesi)는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 예시에서 1710년 태어났다,
페르골리시는 어린시절부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 했다, 그에게 음악의 기초와
라틴어를 가르처준 사람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이었다,
그의 명성을 최고로 만든것은 희가극 "마님이된 하녀" 였다,이곡은 지금도 나폴리학파의
오페라부파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저있다,
페르골리시는 어렸을때부터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와 매우 병약한 소년 이었다,
페르골리시는 자신의 후원자중 한명 이었던 카리아티 영주의 부인 마리아 스피넬리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오래갈리 없었다, 사랑이 종말을 고했을때
페르골리시 에게 남은것은 결핵 이라는 병 뿐이었다,
그때 페르골리시가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찾아간곳이 그를 어린시절 키워준 프란체스코
수도원 이었다, 수도원은 나폴리 교외의 포추올리의 작은마을의 산언덕에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25살 이었다, 페르골리시가 포추올리의 수도원에서 쓴 곡이 바로
<스타바트 마테르> "성모애상" 이다,
페르골리시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들어보면 그가 이곡을 작곡 하는동안 그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생각 했음을 알수있다, 병든 육신으로 살아온 그가 죽은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할 그의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며 그는 이곡을 썻을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자신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자 성모는 아들이 못박힌 십자가를 올려다 본다,
아들의 주검앞에서 슬퍼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심정을 그린 작품이 바로 <스타바트 마테르>
"성모애상" 인것이다, 페르골리시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시작되면 두명의 여성 성악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한다, 번갈아 부르는 두명의 여성 성악가의 음성은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통곡에 가까운 절규이다,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한 작곡가는 많이 있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페르골리시의 <스타바트 마테르> 뒤에 나온 곡으로 롯시니의 곡이 유명하다, 롯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는 당연히 페르골리시의 곡에서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다음해 1736년 페르골리시는 26살 꽃다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수도원 입구에는
"바티스타 페르골리시"를 추모하는 기념탑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참고로 페르골리시의 <스타바트 마테르> 녹음 음반 몇을 소개한다,
1, 이탈리아 지휘자 리날도 알렉산드리니 지휘 콘체르토 이탈리아니 연주 라이브 음반,
2, 클라우디오 아바도 자휘 런던 심포니 연주,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
피아노 이진영
소프라노 이윤주
오르간 손세라
오르간 손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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