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대군,광평대군,영순군 제향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삼선조이신 무안대군, 광평대군, 영순군 제향이
2014, 4,14,월(음3,15)12;00 강남구 수서동 광평대군 묘역에서 500여명의
종친,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온데 성대하고 엄숙하게 봉행 되었다.
사당 정묘에서 매년 음력 3,15,12;00 삼선조에 대한 제향을 봉행하며
제1실 에는 무안대군과 부인 개성부부인 개성왕씨
제2실 에는 광평대군과 부인 영가부부인 평산신씨
제3실 에는 영순군과 부인 김제군부인 전주최씨의 위패가 모셔저있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은
태조 고황제의 7남으로 신덕고황후 강씨 소생이다.
고려조 말에 고공랑 벼슬을 하고 태조 고황제 께서 개국 하시어
무안대군의 봉작을 받고 좌군절제사에 임명 되었다,
1395년 고황제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셨으나 1398년 정도전의 난때
태종은 동생 무안대군 에게 너는 통진으로 가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오라 하였으나 과잉충성하는 무리에게 양화나루에서
해를 당하여 겨우18세 나이에 조졸, 김포통진 도진릉동에 모셨다가
그후 경기 광주 학산리동 광평대군 묘옆으로 이장 하였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은
세종대왕의 5남으로 휘는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시호는 장의공(章懿公)이다.
세종7년(1425)년 출생하여 세종14년 광평대군으로 봉작 되었다.
11세에 신자수의 딸과 결혼하고 같은해에 성균관에 입학 하였으며
음율, 산수, 서법, 강궁, 격구등 6례에 밝았다.
세종26년(1444) 20세 되는 해에 창진으로 사망하여 지금의 선릉부근에
초장 하였다가 연산군 원년에 지금의 광수산으로 이장 하였다.
"연려실기술" 에는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걸려 여러날 앓다 죽었다고
기술되어있다. 조졸당시 외동 아들 영순군은 생후 5개월 이였다.
광평대군이 죽자 부인 평산신씨는 마음을 의지할곳이 없어 묘의 인근에
견성암(현재의 봉은사)을 세워 광평대군의 원당으로 삼고 비구니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영혼을 천도하였다.
견성암은 1498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에 대비 정현왕후가 지금의 봉은사 자리로
옮겨 봉은사라 개명하고 중창 하였다고 봉은사 말지에 기록하고 있다.
영순군(永順君)은
광평대군의 외아드님 이시며 휘는 부(簿), 자는 준지(俊之),
시호는 공소공(恭昭公) 이다,
출생한지 5개월만에 아버님이신 광평대군이 돌아가시자 세종대왕 께서는
가엽게 여기시고 왕자의 예와같게 대하셨다.
1451년(문종1) 8세때 가덕대부 영순군의 봉작을 받고 1455년(단종3)에
소덕대부와 1458년(세조4)흥록대부에 승계되었다.
영순군은 성종 4년 안암동 사저에서 27세에 졸하셨다.
영순군은 남천군 정, 청안군 영, 회원군 쟁 등 3남 1녀를 두었다.
2014, 4, 14, 촬영,
재실을 떠난 제관 일행이 사당 정묘로 향하는모습
재실에서 출발을 기다리며 휴식하는 제관일행
재실앞 에서 제관들이 출발을 기다리는모습
종회 이사장단과 제관일행, 앞열 좌에서 셋째 이택종 이사장, 이규명 종손
이규명 광평대군 종손 (맨오른쪽)
종손과 헌관 일동
제향을 마치고 장학생으로 선발된 종친 자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이택종 이사장
장학금을 수여한 종친 자녀들과 이택종 이사장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