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삼전도비가 있는 석촌호수에서 바라본 롯데월드 전경
삼전도비
정묘년에 청나라가 불시에 조선을 침노하여 조선의 인조는 부득이 형제의 의리를 맺고
10년간 평화로왔으나 세력이 더욱 강력해진 청은 이제까지의 형제국의 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엉뚱한 제의와 함께 병자년 12월에 우선 그의 선봉으로
마부대를 시켜 10만의 대군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서 백마산성에서 강병으로
북쪽을 지키고있던 조선의 명장 임경업을 피하여 사잇길로 풍우와같이 한성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먼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시켜
묘사의 신주를 모시게하고 각 비빈들을 우선 강화도로 난리를 피하게 하였습니다.
다음날 인조는 뒤를 따라 강화로 가려하였으나 이미 길이 막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는 함락되고 청병들은 세자와 비빈을 잡아 임금이 머무는 남한산성에 당도하니
조정에서는 청과맞서 싸우자는 의견과 순순히 항복 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청과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의 거두는 오달제, 홍익한, 윤집,
그리고 김상용의 동생인 김상헌 이었고, 화의파로는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녹립과 전복의 차림으로
송파강 오랑캐의 진중으로 내려가 수항단 단상에 앉은 청태종에게
사배구고두(네번 절하고 머리가 땅에 닿기를 아홉번)의 항복의 례를 올리는
수모를 당하고 군신의 맹세를 맺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태종은 조선국이 항복하는 조건으로 인조의 세자와 대군을 볼모로하는 일과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김상헌과 삼학사라 불리운 오달제, 홍익한, 윤집등을
청의 서울인 심양으로 잡아 보내라고하며 송파강앞에 승전비(지금의 삼전도비)를 세우고
호기당당하게 돌아갔습니다.
한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세자들을 보냄에 있어 모화관까지 전송을하고
가는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남에있어
눈물로 작별을 하니 김상헌은 이별의 글을 남겼는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수상하니 올둥말둥 하여라
라고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어 그의 불타는 애국심을 나타냈습니다.
강화에서 화약불에 타죽은 선원 김상용과 심양으로 끌려간
청음 김상헌을 나서 길러낸 부인 정씨는 김극효의 부인이요
친정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의 따님 이십니다.
그후 청에 끌려갔던 김상헌은 천행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삼전도비문을 쓴이는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인 이경석 공이고
삼전도 비에는 이런 슬픈 역사적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지금은 잠실역 근처 석촌호수공원 압구에 초라하게 사진과 같이 서있습니다.
잠실역부근 석촌호수공원 입구에 서있는 삼전도비
삼전도 비문 안내표지석 내용
삼전도비